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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의 음악의 시작, 음악적 업적, 사망과 유산

by 마크트레져 2025. 2. 20.

크리스토퍼 월라스(Christopher Wallace), 더 잘 알려진 이름인 '비기 스몰스'는 1972년 5월 21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가출하고, 그의 어머니인 베르나이스 월라스는 그를 혼자서 키웠다. 월라스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고, 그가 자란 동네인 브루클린의 세인트 메리, 켄싱턴과 크라운 하이츠는 범죄가 많은 지역이었다. 월라스는 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찍이 거리 문화와 힙합 음악에 눈을 뜨게 된다.

 

비기의 사진

비기의 어린 시절과 음악의 시작

비기는 8살 때부터 랩을 시작했으며, 당시부터 이미 뛰어난 가사를 쓰고 랩을 하던 아이였다. 그는 학교에서 나름대로 인정받았고, 나중에 거리에서 이루어진 랩 배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월라스는 "The Notorious B.I.G."라는 예술적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름은 그가 거리에서 벌이는 경험과 연결되어 그의 음악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의 일찍이 랩에 대한 열정은 결국 그를 거리의 범죄와 마약 밀매와 연관시키게 된다. 비기는 마약을 팔며 빠르게 돈을 벌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는 한때 경찰에 의해 여러 번 체포되기도 했다. 이 시절의 경험들은 그의 후속 음악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고, 그가 후에 발표할 가사들에 대해 강한 진지함과 리얼리티를 전달하게 된다.

 

비기의 음악적 업적

1992년,비기는 유명한 프로듀서인 션 '퍼프 대디' 콤브스(Puff Daddy)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음악적 경로를 전환하게 된다. 콤브스는 그를 자신의 레이블인 ‘배드 보이 레코드(Bad Boy Records)’와 계약하게 만들었고, 비기는 첫 앨범인 Ready to Die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앨범은 1994년에 발매되었고, 힙합 씬에서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Ready to Die는 비기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강렬한 가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사에서 비기는 거리에서의 범죄와 마약 밀매, 그리고 그가 겪은 고난과 어려움을 고백했다. 앨범은 “Juicy,” “Big Poppa,” “One More Chance” 등 여러 히트곡을 담고 있었고, 그의 음악적 재능과 거리에서의 경험을 완벽하게 결합했다. 이 앨범은비기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그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고, 힙합의 전설적인 앨범으로 남게 되었다.

Ready to Die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곡은 바로 "Juicy"였다. 이 곡은 비기가 자신의 성장 과정을 회상하며,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 성공을 이룬 이야기를 담고 있다. “Juicy”는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고, 비기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이 곡은 또한 힙합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곡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비기는 그 당시의 힙합 씬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그는 거침없는 가사와 거리 문화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통해 대중과의 깊은 연결을 만들어갔다.

1990년대 초반, 힙합 씬은 동부와 서부의 갈등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동부의 힙합 씬을 대표하는 아티스트인 비기와 서부의 대표적인 힙합 스타인 투팍(2Pac) 사이의 갈등은 결국 그들의 음악과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기는 퍼스트 앨범에서 "플로리다에서 2Pac과 대립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 갈등의 시작점이었다. 이 갈등은 여러 인터뷰와 공개적인 발언을 통해 점점 격화되었고, 각기 다른 서부와 동부의 팬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투팍과 비기의 관계는 복잡하고, 음악을 통한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한때 친분이 있었지만, 1994년 뉴욕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 이후 그들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투팍은 자신이 공격당한 사건이 비기와 퍼프 대디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 간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이 시점에서, 힙합 씬에서의 갈등은 단순한 음악적 대립을 넘어서, 실제적인 폭력과 위협의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비기는 계속해서 음악에 집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가사로 풀어냈다.

비기의 사망과 유산

비기는 1997년 3월 9일, 자신의 두 번째 앨범 Life After Death를 준비 중이었다. 이 앨범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의 죽음 이후에 발표되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Life After Death는 두 장의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기의 음악적 깊이와 다양성을 엿볼 수 있는 앨범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앨범을 발매하기 전, 1997년 3월 9일, 비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를 타고 가던 중 총격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힙합 씬에서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팬들과 아티스트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가 죽은 이유와 관련된 논란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동부와 서부의 힙합 갈등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비기는 힙합의 전설적인 아티스트로 남았다. 그의 음악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힙합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비기는 거리 문화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며, 그가 살아온 고통과 성공을 그 누구보다 진솔하게 풀어냈다. 그의 죽음 후에도 Life After Death와 같은 작품들이 그의 음악적 유산을 계속해서 확산시키고 있다.

그의 음악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비기의 삶은 힙합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기는 단순히 힙합을 넘어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메시지를 전달한 아티스트로 기억될 것이다.